지죽도 죽도 어촌앵커조직 신하나 팀장
인구감소, 지방소멸, 기후변화의 거대한 파도앞에 이제와서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잠겨가는 섬에서 사람들을 한 명씩
끌어올리려 애쓰기보다는 그들에게 구명조끼를 파는 장사꾼이 되는게 맞지않겠냐는 자조 섞인 사회적기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맨땅에 헤딩' 하고 있는 사람들의 용기와 수고로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고흥에서의 생활이 막 6개월을 지나고 있다.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남는’이라는 말처럼 호주와 아프리카 사막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던 내공이 있는데,
심지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온 전라도라면 뭐... 처음부터 연고 없는 지방생활에 대한 걱정같은 것은 없었다.
‘어디’ 보다는 누구와 ‘함께’가 더 중요함을 알기에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는 지역에서의 활동,
‘마을’ 현장에 상주하며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계획하던 귀농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어촌에서의 일을 위해 '고흥'으로 한달음에 이주했다.
그리고 2024년 4월, 마침내 운전을 시작해버렸다.
운전, 담배, 결혼은 내 인생에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운전하지 않으면 닿기 어려운 전남 ‘고흥’의 남쪽 끝 어촌마을로의 출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두 개의 마을을 지나야 하는 대모험이었지만, (목숨 걸고)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한 장소씩 클리어하면서 매일 달라지는 눈앞의 초록초록한 풍경과 하늘을 만났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 식당, 카페가 차량으로 20분 거리에 있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곳이지만
그렇기에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생각에 잠들어 있던 열정이 솟아났다.
처음에는 내가 누구인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던 주민분들과의 만남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녕하세요’로
가벼워졌고, 동료들이 추가되고, 서로와 신뢰가 쌓인다는 것을 체감하며, 마을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있다.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지역이 지속가능하도록 사람과 사업을 불러들이는 ‘신활력’이라는 미션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실과 행정지침 사이에서 손발이 묶인 기분이 들기도 하고, 누군가를 잠시 행복하게 하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를 섭섭하게 만드는 일이 될 때도 있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마을에서 보내며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아서 가끔은 영화 ‘무간도’에서 마약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맨땅에 헤딩은 역시 머리가 깨질 수도 있는 위험스러운 일이구나 싶다.
하지만, 다정한 주민들의 말 한마디와 예상치 못했던 작은 변화들을 만날 때마다 거대한 파도 앞에 나 혼자 서 있는게 아니라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 파도를 지나보면 우리는 파도를 즐기는 서퍼가 되어 있을 수도, 혹은 파도 뒤의 아름다운 섬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희망과 기대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내일 아침 또 다시 초보운전 실력을 뽐내며 익숙한 출근길을 달려올 예정이다. (웃음)